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1998년 3월 30일을 기해 문을 내렸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뜻에 따라 대통령 임기 동안에는 모든 사조직을 해체하라고 당부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1997년, 임기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미국을 방문하셨을때 인권연 주요 인사를 초청하여 "건강상 이번이 마지막 미국방문이 될 것같다"고 말씀하시면서,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것이다. 대통령이 된 다음에도 동지들에게는 따듯한 밥한끼도 대접하지 못하여 미안한 마음이지만 이제 또 한번 동지들에게 조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해 주실 것을 당부드려야 할 것같다. 다시 한번 조국을 위해 애써 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에 인권연 동지들은 즉석에서 14만 불의 기금을 모금하고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정동영 후보를 지원하는 대선지원단을 꾸리고 다시 활동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래는 인권연의 과거 역사를 기록해 놓은 자료를 옮겨놓은 것입니다.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연혁 (1997년 12월 20일 현재)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1983년 김대중 선생께서 미국 망명 중 설립하신 비영리단체다. 김대중 선생이 미국 망명 생활 중에 당면하였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미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이었다. 많은 미국 지성인들과 지도자들은 한국을 비롯한 유교영향권 나라들은 민주주의를 할 능력이 없는 나라라고 낙인을 찍고 있었다. 미국 정치지도자들은 불행했던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있었고, 북한 공산당이 남한에 총구를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급한 것이 아니라 남한 정권의 안정만이 미국의 최대 관심사였던 것이다, 결국 1980년 광주사태 당시 미국은 민주주의 발전을 소홀히 한 채 남한의 안정만을 강조하다가 결국 일을 그르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된 것이다.
1982년 12원 23일, 김대중 선생이 미국에 망명하여 정착할 아파트도 구하지 못한 채 워싱턴 근교 수녀원에서 가족과 함께 묵으시면서 제일 처음으로 하신 일은 미국인들의 도덕적 지지틀 호소하는 일이었다. 83년 정초 CNN과의 Interview 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도덕적 지지를 하여줄 것을 부탁하는 말씀으로 김대중 선생의 미국 내에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김대중 선생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I don’t advocate the Reagan Administration’s interference to our domestic affairs. We only need their moral support and we only ask them not to support dictatorial rule in Korea. Then the realization of democracy and the realization of human rights should be a matter of our business, not America’s business."라고 강조했다.
이 연설을 시작으로 선생은 미국의 지성인들과 대학교수, 정책 입안자, 정치지도자들에게 한국이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나라이며, 미국은 한국의 독재를 지원하지 말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도덕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지원하여 달라고 호소했다. 미국 전역을 다니면서 대학과 국제정치 연구기관의 연설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강조하였다.
당시 미국의 인권단체들 가운데 김대중 선생이 자신의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를 바라는 단체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필리핀의 김대중”이라 하는 Ninoy Aquino 역시 International Center for Development Policy 라는 단체에서 필리핀의 민주화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신한국당 국회의원이었던 이신범 씨 역시 그곳에 속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선생은 그와 같은 제의를 단호히 거절하고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우리 손으로”라는 한가지 일념으로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이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미국에서 비영리 교육단체에 헌금하는 것은 세금공제가 되기 때문에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발족시키면서 비영리단체로 등록을 하라는 인권변호사들의 제의를 받아들여 83년 7월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출발 당시 김대중 선생이 이사장 겸 소장을 맡았고 이근팔 선생이 김대중 선생의 비서 겸 사무총장으로 일했다. 이근팔 선생은 외교관 출신으로 영어에 아주 능할 뿐 아니라 성격이 대쪽같이 곧은 분이었다. 초대 이사진은 김대중 선생, 문동환 목사, Harvey 목사, 이영작 박사 등 6-7명에 불과하였다. 당시 이사로 참여한 분들은 모두 영어가 유창하여 미 의회와 행정부, 언론, 정책연구소 등을 대상으로 한국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1998년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잠정적으로 문을 닫았다가 2007년 김대중 대통령이 워싱턴에서 구 인권연 동지들을 초대하여,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인권연 동지들에게는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다.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아무런 대가도 없이 헌신해 온 동지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지만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다시 한번 노력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이에 한국인권문제연구소 구 중앙이사들이 모여 한민족경제비전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잠시 활동하다가 2018년에 신대식 목사, 김치환(전 사무총장), 윤득중, 고대현, 배태일 박사(전 소장), 장현석(전 기획간사), 안정원(전 총무간사) 등 다수가 중심이되어 다시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정식으로 재건하였다.
[오래된 인권연 자료를 PDF로 저장한뒤 OCR을 이용하여 글로 전환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래는 아직 교정이 완료되지 못한 것으로 오타가 많습니다. 차후 교정할 내용임을 밝힙니다]
2. 한국인권문제연구소의 재정
본 연구소의 활동자금을 충당하기 위하여 김대중 선생은 여러번 서예전올 열어 글올 써서 팔았습니다 또 본 연구소에 헌금을 하는 분에게는 글을 써서 주셨기 때문에 김대중 선생의 망명 중에 선생을 도운 분들은 선생의 글올 한 두편씩은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1985년 2월 김대중선생이 한국정부의 재투옥 위혐에도 불구하고 귀국의 길에 올랐을 때 서예전에서 벌어서 쓰고 남은 돈과 교포들이 헌금한 돈 등 김대중 선생이 가지고 계시먼 전액인 10여 만블을 모두 한국인권문제연구소에 남겨놓고 미국에서의 활동을 당부하였습니다. 그후에도 교포들이 김대중선생에게 휠동하는데 쓰시라고 한국에가서 돈을 드리면 언제나 인권문제연구소에 갖다주라고 하셨기때문에 그런 분들이 인권문제연구소 활동자금으로 헌금한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김대중 선생은 ”미국돈 만블이연 미국에서는 하늘이 알아주는 큰 돈”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항상 교포들이 인권문제연구소에 주는 돈은 힘들게 벌어서 주는 돈이니 귀중하게 여기고 아껴 쓰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김대중 선생이 주고 가신 돈 10만불을 다 쓴지 오래 되었지만 아직까지 한국인권문제연구소가 유급직원을 두고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김대중 선생의 뜻에 동참하여 인권문제연구소를 재정적으로 도와 주시는 뜻있는 분들의 헌금과 이사들이 매해 이사비로 내어주는 돈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 김대중선생이 1985년에 귀국하셨을때 한국에 인권문제연구소 후원회를 설치하고 인권문제연구소를 지원하였으며, 93년부터 96년까지는 내외문제연구소 회원들이, 그리고 현재에는 국민회의 국회의원 가운데 뜻있는 분돌이 인권문제 연구소 후원회를 조직하여 미국에 있는 한국인권문제연구소 활동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지금도 해마다 재정보고를 김대중 선생에게 직접하고 있으며, 김대중 선생은 한국인권문제연구소애 헌금히는 분들을 기억하고 항상 감사히게 생각하십니다.
3. 한국인권문제연구소의 활동
김대중 선생이 귀국하신 후 이곤팔 선생이 사무총장으로 현 광주출신 국회의원인 정동채씨가 재무 겸 회계로, 교포 언론인인 심기섭씨가 홍보담당으로, 현 진북도지사인 유종근 박사가 소장 대리로, 이영작 박사가 이사장 대리 로 활동을 하였고 지금은 고인이 원 최성일 박사가 후에 Executive Director로 활약하였습니다. 정치학 진공인 최 박사는 김대중선생의 옥중서한을 번역하여 University of California-Berkeley에서 출판하였고 경제학 전공인 유박사는 킴대중 션생이 83년 - 84년 Harvard 대학에서 l년간 연구생활을 하시면서 쓰신 대중참여 경제론올 번역하여 Harvard 대학에서 출판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힘잡기 좋아하는 사랍들은 김대중 선생의 대중참여 경제론은 유박사가 써서 선생께 바치었다고 말을 하는데 그것은 진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대중창여 경제론의 근원은 1971년 대선 당시 김대중 선생이 자신의 경제정책 을 정리한 것이고 83-84년 Harvard 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하시면서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독재가 불가피하다는 개발독재론의 허구성을 지척하고 민주주의 아래서 만이 항구적 경제발전이 가능하다는 이론과 자신이 집권하면 어떤 경 제정책올 펼 것인가를 정리하여 71년애 출판하였던 대중참여 경제론을 수정하여 김대중 선생이 쓴 글을 경제학자인 유박사가 번역한 것입니다. 미국 주요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던 이 책은 최근 Harvard 대학에서 수정중보하여 다시 출판하기도 하였습니다.
85년 김대중선생이 귀국히신 후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망명당시 친분을 맺은 미국내 인권지도자를과 정치인틀을 관리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였습니다, 한국 정치상황을 알려드리고 선생의 근황을 알리기위헤 워싱톤에서 는 매월 정기적으로 우래옥에서 미국 정계지도자들을 위한 브리핑을 하였고 또한 별도로 한국 교포들을 위하여 세미나를 가졌습니다. 귀국 후에도 선생은 수없이 가택 연금을 당하셨기 때문에 월례 인권문제연구소 브라핑에서 전화를 김선생 자택으로 연결하여 확성기를 대고 한국의 상황을 김 선생이 영어로 브리핑에 참석한 미국 사랍들에게 설명하여 한국의 정치상황을 알리고 그들의 도덕적 지지를 호소하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외에도 본 연구소 직원들은 미국 의사당을 이웃 집 드나들듯이 다니면서 미국 상원, 하원의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습니다. 당시 유급직원이 4명이나 되었고 본 연구소의 활동 상황이 86년 10월 The New York Times 지에 상세히 보고되어 본연구소를 망명대사관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에 관련된 미의회 법안에 인권문제연구소의 입김이 닿지않은 법안이 없다고까지 The New York Times지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두환정권과 친분이 좋았던 레이건 행정부시절에도 미국무성 인권국은 본연구소와 정례척으로 회의를 갖을 정도였으며 그와 같은 회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김근태씨 고문사건을 뉴욕타임스지에 폭로하여 김근태씨의 구명운동에 기여하였 고 백기완씨가 고문당하고 구속되었을 때 전세계 인권단체에 알려 구명운동에 참여하였고 권인숙양 성고운사태를 자세하게 소개하여 군사독재정권의 부도덕성을 전세계에 알렸습니다. 이와 같은 활동을 통하여 양심범돌을 도와왔던 것입니다,
군사독재의 또 다른 비인간성을 소개하겠습니다. 당시 많은 에학생들이 감육에 구속되어 있었는데 그들에게 매월 필요한 위생기구를 거부하고 감염이 되어도 치료마저 못 받게하여 여학생들의 고생이 많았습니다. 이와 같은 사태를 민주가족 협회에서 본 연구소로 알려왔고, 본 연구소는 세계 인권단체들과 협의하여 항생제를 구하여 보내 여학생들이 치료를 받도론 한 일도 있었습니다.
또한 본 연구소는 87년 6월 항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87년 초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자 한국의 민가협에서 제보를 받고 미언론에 터트리어 국제여론화시컸고 그제서야 국내언론에서도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사건이 보도되어 반독재운동이 더욱 크게 확산되었고, 결국은 87년 6월 항쟁으로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4. 목표와 행동강령 : 先民主훌훌一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85년 이래로 다옴과 같은 원칙을 지키연서 활동을 하여왔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先民主後統 한국이 우선 민주화가 되고나서 통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며 行動뼈짧은 非容共, 非反훗, 非훌力입니다. 본 연구소는 이러한 목표나 행동강령에서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항상 통일지상주의자들을 경계하고, 공산주의를 반대해왔으며 북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항상 분명하게 하였습니다. 우리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하면서 지금까지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전두환독재가 한칭 기숭올 올릴 당시, 86년 12월말, 당시 소수 백인들의 지배하에 있는 남아연방이 경제봉쇄를 당하고 있을 때 미의회에서는 한국에도 민주주의를 위하여 경제제재를 하여야한다는 주장과 그에 관한 결의문을 통과시키자는 주장이 나왔을 때, 본 연구소는 단호하게 반대하였습니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되면 국민이 고생하게 되고 독재 정권이 고생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민주화만이 지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87년 5월말, 6월 초순에 또 다시 미의회애서 미군철수를 위한 결의문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본 연구소는 역시 단호하게 반대하였는데 역시 미군철수가 한국 민주화에 도움이 안되고 또 북한이 엉뚱한 생각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 연구소의 판단과 행동은 김대중 선생이 정하셨던 목표와 행동강령에 의거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북한을 이롭게하여 우리의 국익을 해치는 일을 하여서는 안된다는 원칙이 분명하며 우리는 그와 같은 원칙올 지금도 굳게 준수하고 있습니다.
5. 한국인권문제연구소의 지회
본 연구소에는 현재 워싱턴근교인 메릴랜드 락빌지역에 본부 사무실을 두고 있으며, LA,아틀란타, 센프란시스코, 콜로라도, 시애틀, 필라델피아, 휴스턴, 세인트루이스, 시카고, 캐나다 토론토 둥 북미주 14개 지역에 지회를 두고 있으며 앞으로 몇군데 더 생길 전망입니다.
제일 처옴으로 지회가 생긴 곳은 Los Angeles 지역입니다. 85년 3월에 L.A. 지회가 발족하였는데 목적은 두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김대중 선생이 친분을 맺은 캘리포니아주 출신의 성원의원과 하원의원들을 관리하고, L.A. 에 있는 미국 인권기관들과 긴밀한 협조를 하기 위해서는 역시 LA에 지회가 생기어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Washington 에 있는 본부의 활동을 재정적으로 돕기위하여 각지역에서 뜻이 있는 분들에게 모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어서 Chicago에서는 유일룡박사가 주축이 되어 인권문제연구소 시카고지회가 창립되었습니다. 그후 많은 지역에 인권문제연구소 지회가 발족하게 되었고 각 지회애서 미상원의원과 하원의원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각지역 활동을 통하여서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를 하여 왔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지회는 각 지역에서 본 연구소의 설립취지에 동창하는 분들이 자발척으로 모여서 지회를 만들고 본부와 인연을 맺으면서 휠동하고 있습니다. 지회의 인선과 조직은 완전히 지회에서 자발적으로 결정하며 본부에서 이에 판여를 한 경우는 한번도 없었고 또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지회에서의 활동에 헌금을 하면 세금공제를 받올 수가 있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 연구소 사무실로 연락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6. 한국인권문제연구소의 미래
때때로 이제 한국에 민주화가 되었으니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문을 닫을 때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분틀을 보게됩니다. 하지만 한국이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가에는 의문의 여지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보연 멕시코는 지난 80여년간 민선 대통령을 션거로 뽑지만 엑시코를 민주주의국가로 분류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여야간의 수명적 정권교체가 한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최근까지도 일본이 민주주의 국가인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졌는데 일본에 최근까지 여야간의 수명적 정권교체가 없었기 때 문입니다. 그러나 최근 사회당총재 무라야마가 수상이 된 이래로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민주주의 국가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명적 정권교체가 이루이졌기 때 문입니다.
같온 액락에서 보았옴 때 불행하게도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라기보다는 ”민주주의 도상국”이라고 보아야합니다. 60년대 ”민주주의 도상국”였던 필리핀이 민선 대통령인 마르코스의 20여년 독재로 민주주의 후진국으로 전락했다가 86년 people power 혁명에 의하여 밀려난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업니다, 민주주의 도상국인 한국도 역시 여야간의 수평적 정권교체의 민주전통이 실천될 때까지는 우리는 항상 감시 감독하고 독려하여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남한에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면 남북평화통일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김영삼정권이 지난 3년반 집권기간중에 18차례에 걸쳐서 대북정책을 바꾸었고 지난 4.11 총선에서는 판문정사건올 침소봉대하여 국민들을 위협하여 선거에 이용한 것은 모두 잘 아는 사실입니다. 97년 12월 대선에서 역시 정부여당은 용공조작을 할 것이고 이미 지금부터 그와 같은 조짐이 여러 곳에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한국은 민주주의 도상국이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닙니다. 잘못하면 멕시코의 전철을 밟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부홍히던 필리핀이 민선 대통령인 마르코스의 독재로 불과 몇년만에 경제력이 제3세계 경제 수준으로 타락한 전례를 볼 때 한국이 완전한 민주국가를 이루지 못한다연 한국도 필리핀처럽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본 연구소는 지금도 한국에서의 인권 탄압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예를 두가지만 들어 보겠습니다. 95년 9월 문익환 목사 사모인 박용길 장로가 북한올 불법방문하였다 하여 한국정부에 의하여 구속되었숨니다 갑옥에 투옥된 박 장로는 지병인 당뇨병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당국은 병원치료들 거부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태를 본 연구소에 알려왔고 본 연구소는 전세계 인권단체에 이와 같은 상황을 알리어 인권단체들이 한국정부에 항의하여 정부당국은 박 장로를 벙왼으로 입원시키어 치료를 받게 하였습니다.
또 최근에는 New Zealand 주재 최영진 영사가 政府電文올 위조하었다 하여 본국으로 강제송환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New Zealand 정부가 최 영사의 인권을 침혜하였고 본 연구소는 New Zealand 언론기관과 또 각 인권단체에 알리어 부당한 일을 항의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한총련 여학생 추행사건이나 노동법 날치기통과 둥에 대해서 관련 인권단체와 노동단체동에 알리어 이를 국제여론화시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특히 안기부법, 노동법 날치기에 대해서는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하여 많은 호웅을 얻은바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일이 계속 휠 것으로 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가 굳게 자리잡은 미국에서도 자국민의 인권보장을 위하여 많은 인권단체들이 미국을 감시하고 있으며 대표적으로 Amnesty International 같은 국제기구에서도 미국에서의 인권남용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인권중진 용호를 위하여 오늘도 투쟁하고 있습니다.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할 일은 앞으로도 무궁무진합니다,
많은 분들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위하여 미국에 흥사단올 세운 것올 잘 알고 있습니다. 해방된지 50년이 넘은 오늘도 흥사단이 힌국과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은 항상 일본을 경계하고 또 우리의 민족혼을 살려야 한다는데 주요 목적이 있습니다. 한국인권문제연구소도 역
시 설립자이신 김대중 선생의 뜻을 살리어 한국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또 통일을 이루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7. 재미동포 인권을 위한 활동
앞으로 인권문제연구소는 교포들의 인권증진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여야 할 것입니다. 교포들의 인권문제는 크게 두가지 차원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는 교포들의 한국내에서의 권리를 보장 받는 것입니다. 교포들의 국내 재산권이 보호를 못받고 있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잘알려진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이 미국 시민권을 받게 되면 한국에서는 완전히 외국인으로 취급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 전세계 나라중에서 외국애서 사는 자국민올 이렇게 차별하는 나라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포들이 한국을 위하여 많은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본 인권문제연구소는 이와 같은 문제를 시정하기 위하여 그동안 많은 일을 하여 왔습니다.
94년 12월에는 한국 국회에서 본 연구소 이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교포들의 국내 지위향상을 위한 청문회를 열었고 현 새정치국민회의 국회의원틀이 중심이 되어 교포들의 국내 지위 향상을 위한 법개정을 지금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96년에는 이중국적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전국지회를 통해 서명운동을 벌이어 많은 호웅을 얻은바 있습니다.
교포들의 또 한가지 인권문제는 미국 내에서의 권리를 보장받는 일입니다. 그간 여러 지회에서 교포들의 권익이 침범될 때마다 본 인권문제연구소 이름으로 항의를 하여 문제 해결을 한 경우가 많습니다. 또 필요환 경우에는 상원의원이나 하원의원에게 부당하게 권익이 침범되는 일을 알리어 해결한 경우도 있는데 특히 분명치 못한 이유로 미국입국이 거부되는 경우 본 연구소에서 항의하여 해결하여 왔습니다. 현재는 welfare 법안이 개정되어 특히 노인들이 어려움올 겪게 될 전망이이서 이에대한 보호노력이 시급한 상황입니다.
본 연구소는 두가지 차원으로 이문제에 접근할 것입 니 다 하나는 국내 애서 어떤 도움을 줄수 있는가를 연구하여 보는 방안입니다. 몇년전 Mexico 출신들이 미국에서 부당하게 대우를 받게되자 Mexico 정부에서 미국정부에 항의하여 수정 된 적이 있는 전례를 잘 생각하여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이곳에서 본 연구소에서 직접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연구하여 보는 일입니다. 금년 8월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초청으로 방문한 새정치국민회의 국회의원들에게 현 교포문제들을 잘 알게하여 우리 교포들의 권익향상을 위하여 노력한 것 둥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8. 북한의 인권
말을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흔히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왜 북한의 인권문제는 거론하지 않고 남한의 인권만 거론하는가를 묻습니다 우리의 경험으로는 인권올 유린당한 당사자를 알아야 하며 또 당사자가 자신의 인권이 보호받기 바라는 상황에서 인권문제를 다룰때 인권문제는 가장 효과적으로 다루어집니다. 비특정 다수의 인권올 이야기하는 것은 원칙적인 차원에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통일전의 북한의 인권문제는 비특정 다수의 인권을 옹호한다는 차원이상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먼저 병화적 남북통일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의 경우를 보십시오. 중국이 서방세계에 개방될 때까지는 중국의 개망이 목표였고 이제 중국이 열린 상황에서 중국의 정치범들의 인권탄압에 대하여 진세계의 인권단체가 초정을 맞추고 있음올 인식한다면 본 연구소 역시 북한의 개방이 시작되어 구체적인 인권탄압 사례가 알려질 때 북한의 인권상황을 효과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될 것이며 그렇게 될 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기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9. 한국인권문제연구소와 아태재단
한국인권문제연구소와 아시아태평양 평화재단 (아태재단)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아태재단은 김대중 선생이 남북평화 통일올 위한 연구와 아시아의 민주화추진과 세계평화에 기여하고자 1994년 정월 한국에서 세운 기관입니다. 따라서 아태재단은 근본적으로 한국에 뿌리를 둔 기관이고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미국에 뿌리를 둔 기관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아태재단에서는 재단의 활동을 위하여 1994년 6월 재단 이사회에서 워싱톤에 지부를 두기로 결의하고 본 연구소 소장 겸 이사장인 이영작 박사를 지부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이 결의에 의하여 아태재단 미주지부가 워싱톤에 설립된 것입니다. 따라서 미주내 다른 지역에 아태재단 지부가 설치될 것인가에 대한 것은 미국에서 할 결정이 아니고, 서울에 있는 아태재단 본부 이사회의에서 결정할 일입니다.
반연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순수하게 미국에 뿌리를 둔 기관으로 각 지역에 지회를 두는 것은 미국에 있는 우리가 결정해야 합니다. 아태재단 미주 지부는 아태재단의 미국 창구로서 그 재정의 상당 부분을 본부에서 지원을 받으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미국 내에서 운영자금을 만들어서 우리 스스로 운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태재단 후원회가 미국에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서울에 본부를 두고 있는 아태재단의 재정지원올 위하여 아태재단 후원회가 설립되자 일부 미주 동포들이 아태재단 후원회와 접촉하여 후원회원올 미국에도 두자는 취지로 미주내에 아태재단 후원회가 조직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후원회의 주목적은 미국에서 돈을 모아서 한국에 보내어 아태재단 후원회를 통하여 아태재단의 운영을 톱자는 것임으로 아태재단 미주지부의 재정 지원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비록 김대중 선생을 돕자는 궁극적인 목표는 같지만, 미주내에 조직되고 있는 아태재단 후원회는 아태재단 미주지부와는 별도 기관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10. 워싱턴본부
현재 본부에는 안정원 총무간사가 상근하고 있고, 같이 사무실을 쓰고 있는 아태재단 미주지부에는 미국인인 Steve Costello가 유급직원으로 상근하고 있습니다.
11. 한국인권문제연구소와 한국 정계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출신들이 한국정계에 많이 진출하여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분이 본 연구소 설립자이자 초대 소장 겸 이사장인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입니다. 다옴에 생각나는 데로 나열하여 보겠습니다.
김경재 순천출신 국회의원
정동채 광주출신 국회의원
유종근 전북도지사
조한용 익산시장
박지원 새정치 국민회의 총재실 담당 특보
장한량 새정 치국민회의 충북도지 부장
조성택 전남의회의원
장남진 전남의회의원
김득회 새정치국민회의 특위국장 겸 총재 당무담당보좌역
12 한국인권문제연구소와 미국정계
김대중선생은 60년대에 젊은 정치인으로서 미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것올 시작으로 하여 미국과 갚은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1971년 초 야당대통령 후보자격으로 미국올 방문했을때 한국 정부의 방해로 당시 닉슨 대통령을 못만났지만 대신 이희호여사가 닉슨대통령의 부인인 Pat Nixon올 만나서 선생이 전하고자 한 말을 전했으며, 이때 부터 당시 상원 외교분과 위원장인 Fulbright 상원의원과 Ted Kennedy 상원의원과 친분을 맺게 되었습니다.
1972년 가을 유신체제가 시작되면서 선생의 첫번째 미국 망명이 시작되었을 때 당시 미국의 지성이라 불리는 에드윈 라이샤우워 교수와 친분이 시작되었고, 73년 라이샤우위 교수의 주선으로 하바드대학 특별초청연구원으로 방문예정이었으나 그해 여름 일본 동경에서 중앙 정보위원애게 납치당하여 하바드 대학초청은 10년 이나 연기되어 1983년에야 이루어질수 있었습니다.
그후 1982년 12월부터 85년2월 귀국할 때까지 두번째 미국망명 기간중에 많은 미국친구틀을 만틀게 되었고 지금까지 돈독한 우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특히 84년 가을, 선생이 귀국하겠다고 발표하자 한국쩡부는 귀국하면 다시 감금하겠다고 위협하였지만 85년 2월 귀국을 강행하여 미국과 국제사회에서 용기있는 지도자로 부각되었습니다.
85년 2원 선생이 귀국할 때 미하원의원 Tom Foglietta와 Ed Feighan 의원이 신변보호를 위해 동행하였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선생이 공항에서 납치되는 것을 목격하였는데, Foglietta 의원은 미국의 하윈의원들과 많은 국제인사들이 김대중 선생의 납치를 목격하였기 때문에 정부에사 선생을 해치치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수궁하고 있습니다. Tom Foglietta의원과 선생의 교분은 이런 일들을 계기로 깊은 우정으로 맺이졌고 지금도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상원의원 Barbara Boxer와 선생의 친분관계도 Tom Foglietta의원이 가교를 놓은 것으로 Barbara Boxer의원이 하원에 있을 당시부터 김대중선생과 친하게 지내오고 있습니다.
역대 주한미국대사는 모두 김대중선생과 아주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James Lilley 대사가 그렇고 Don Gregg대사가 그렇습니다. 사실 Don Gregg대사는 선생이 아니었으면 89년 상원에서 인준을 받지못했을 것업니다. 당시 Don Gregg대사가 이란게이트에 관련되어 인준가능성이 낮아지자 선생께서 Don Gregg대사에게 보낸 私信용 꽁회당 상원의원에 공개하고 선생이 Don Gregg를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하여 당시 민주당이 다수였던 상원에서 Don Gregg 의 부임을 승인, 한국대사로 부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Don Gregg대사는 선생의 구명운동에 두번이나 관련된 분으로 1973년 납치 당시에 미국 CIA요원으로 김대중 선생의 구명에 관련되었고,1980난 전두환정권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으셨을 때 미국 카터 대통령이 보낸 특사의 일행으로 한국에 와서 전대통령에게 김대중선생을 처형할 경우 한국은 국제사회로부터 영원히 매장될 뿐아니라 한미관계도 아주 나빠질 것이라는 말을 직접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현재 Korea Society 의 총재이며 미국의 한국문제 및 아시아에 관한 여론과 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Don Gregg와 서로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현재 선생의 미국의 정책과 여론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올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핵위기때 그해 9월까지만 하더라도 핵문제 해결에 "Package Deal(일괄 타결)"이라는 개념이 미국에는 없었습니다. 일괄타결올 기초로한 북한과 미국의 1994년 제네바협상 동의는 김대중 선생의 미국 방문중 미국의 정책 및 여론에 영향올 미친 것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Henry Kissinger는 김대중 선생이 뉴욕에 갈때마다 만나는 단골 손님이고, 선생은 Kissnger가 서울에 갈 때마다 찾아가는 단골손님입니다. 두분의 친분도 있지만 하바드대 대학교수를 지냈고 단절된 중국과의 외교를 재개하였고 한때는 미 대통령의 안보특보, 국무장관올 지냈고 지금은 세계정상의 국제정세 분석가인 Kissinger와 선생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상 서로 상대방의 머리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찾아내고 교환하시곤 하고 있습니다.
또한 카터 대통령 역시 선생과 오랜 연분을 맺고 있습니다. 카터대통령은 1980년 선생의 구명운동에 깊이 관련되었고 또 두분 모두 민주주의와 인권존중에 갚은 신념을 갖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선생이 망명하여 1983년 두분이 처옴 안났올 때 마치 십년지기와 같이 반가와 하시더라는 이야기롤 같이 배석한 분들을 통하여 확인한바 있습니다. 1985년 선생이 귀국하실 때 카터대통령은 친서를 보내 격려하였고, 1992년 9월 선생께서 미국을 잠시 들리셨올 때는 전화로 선생의 대선에 행운이 있기를 바란다는 말씀올 하시기도 하셨으며 그후 수차례 왕래가 있습니다.
김대중선생처럼 미국정책에 많은 영향을 미친 한국정치가도 없을 것입니다. 애를 를면 1972년 망명당시 미군이 계속 주둔해야한다는 주장을 펴기시작하여 지금까지 일관되게 주장하여 왔는데 그 결과 이제는 미국에서도 미군올 철수해야 한다는 말은 틀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선생에 대한 태도는 1994년 카터대통령의 방북이 성공하면서 급상숭하였습니다. 이제는 미국 정책입안가들이 한국과 복한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항상 김대중선생의 의견이 무엇인지를 인권운제연구소를 통하여 듣고자하며 또 미국의 정책입안가들이 서울에 가서 김대중선생의 의견을 듣고 미국정책에 반영시키는 일을 당연시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선생은 오랜동안의 민주투쟁으로 미국 민주인사들과 양심세력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아 왔습니다. 또한 선생의 정치적 혜안을 존경하는 미국 정치지도자들이 주요 한국정책과 동아시아갱책에 대해서 선생의 말씀에 귀를 기올리고 있습니다. 이는 미정계내에서 한국인권문제연구소의 위상도 그만큼 커지고 올라가고 있다는 의미로 우리는 한결 더 큰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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